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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와의 전쟁과 평화

필요한 약제와 의료 장비, 음압 격리병동에 아끼지 말고 써라

서남대학교 의과대학 명지병원

명지병원이 메르스 환자를 전원 받기로 결정하고 나서, 감염내과 이꽃실 교수는 이왕준 이사장을 찾았다. 오래전부터 국내에 신종 감염병 환자가 올 거라는 생각에 관련된 해외 논문들을 찾아가며 연구했고, 국내 메르스 확진자 발생 이후 더욱 매진해 치료 방향까지 설정해놓은 이 교수였지만 아직 치료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치료약도, 백신도, 어떠한 매뉴얼도 없는 질환이었기 때문에 환자를 앞에 둔 의료진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확신을 갖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비용 때문에 평소에 사용하기 어려운 약제를 구해야 했다. 이동 가능한 의료 장비를 가져다 사용해야 하는데 이들은 음압 격리병실 안으로 갖고 들어가면 언제 다시 다른 곳에서 꺼내 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감염의 매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상황 종료 시점까지는 온전히 음압 병실 내에서만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력 역시 평소에 운영하던 의사와 간호사 이상으로 필요해 보였고 보조 인력이 얼마나 투입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국내에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상황이라 참고할 사례조차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꽃실 교수는 하고 싶은 치료는 다 해도 될지를 이왕준 이사장에게 논의했던 것이다. 모든 상황을 들은 이 이사장은 현장의 목소리를 존중해 환자 치료에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이꽃실 교수는 곧바로 약제팀에 연락해 필요한 의약품 준비를 요청했고, 의공팀에는 장비 현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CDRT 조직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병동 인력 중 혹시 음압 격리병실에 들어가기 꺼려지는 사람이 있는지 개인 의사도 확인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의료진은 아무도 없었다. 이꽃실 교수는 전공의들에게 당부했다. 부모님에게 메르스 환자를 보게 됐다는 말을 전하고 음압 격리 병실에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받으라고 했다. 부모와 통화한 한 전공의는 "어머니께서 '의사가 당연히 메르스 환자와 함께해야지 무슨 소리냐'는 말을 하면서 치료를 잘하라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는 사연을 전하기도 했다.

환자에게는 보호구 입은 의료진이 공포의 대상

서남대학교 의과대학 명지병원

메르스로 입원한 환자들은 상당한 고통을 호소했다. 한 환자는 이렇게 아플 바에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의료진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퇴원하기까지 약 보름간 치료를 받은 해당 환자는 입원 후 3~4일간은 "죽여주세요.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 명지병원 음압병실 내에 입원한 상태에서 신문 기자와 전화 인터뷰를 진행한 환자는 "발병 초기만 해도 식사는 생각도 할 수 없고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설명했다. 발열과 심한 몸살 등의 감기 증상으로 시작돼 조금씩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고열로 어지러워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몸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고통스러웠다고 전했다.

의료진과 간호사들은 이런 환자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다. 하지만 메르스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더 컸기에 처음에는 환자의 고통을 공감하기 어려웠다. 초기에는 격리 병상에 들어가 환자와 눈도 마주치기 어려워 자기 할 일만 묵묵히 마치고 빠져나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환자들에게 메르스보다 의료진이 더 큰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환자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격리된 1인실 공간에서 유일하게 마주치는 사람은 의료진인데, 모두 어마어마한 보호구 장비를 착용하고 있고, 맨살이 보이는 건 눈뿐인 상황이다. 그마저도 본인을 회피하는 시선을 느낀다면 환자는 얼마나 더 힘들어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자 비로소 '환자와의 공감'이 이뤄졌다.

이후 의료진은 하루하루 호전되는 환자들의 모습에 함께 기뻐하고 화상전화로 수시로 환자에게 전화를 걸어 따뜻한 말로 격려와 관심을 보여줬다. 간호부의 막내는 한 환자가 "간호사 들어오는 시간만 기다려진다. 매우 고맙다"고 하는 말을 들으며 아무리 숨이 차고 힘들더라도 환자에게 더 마음을 다하고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점차 '메르스는 죽는 질환이 아니라 살 수 있는 질환'이라는 믿음까지 가지게 됐다.

"확진 환자보다 의심 환자 치료가 더 어렵더군요."

해외의 메르스 관련 논문을 찾아 연구해가며 나름의 치료 방법을 찾아낸 이꽃실 교수는 메르스 입원 환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호전을 보이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치료제도 백신도 없는 질환이지만 나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수많은 논문의 치료법들을 찾아보며 좁혀간 공통분모에 해당하는 치료법을 환자들에게 적용한 결과, 5명의 메르스 환자를 모두 완치시켰다. 다섯 명은 증상도 제각각이었고 정도도 달랐지만, 치료법이 틀린 경우는 없었다.

첫 환자 치료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국내 감염내과 교수들이 모이는 SNS 커뮤니티에서 메르스 치료법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때 이 교수는 자신이 그간 환자들을 치료해오던 방법과 다른 병원 의사들의 방법이 거의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치료법에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어떤 경우에는 확진 환자보다 의심 환자 치료가 더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명지병원이 지난 기간 치료한 확진환자는 5명이지만 의심환자는 그보다 훨씬 많은 52명이었다. 확진 환자는 나름대로 확신을 가진 치료법을 적용하면 됐지만, 의심 환자는 고려해야 할 가능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접근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생기곤 했던 것이다.

"어머니. 제가 머리 감겨 드릴까요?"

메르스 환자를 받은 지 일주일 정도가 흐르고 나서, 수액 투여를 위해 병실에 들어선 간호사는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머니. 제가 머리 감겨 드릴까요?"라고 무심결에 말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어려운 상태로 일주일을 보낸 환자이니 제대로 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답답하실까 하는 생각에 나온 말이었다. 

해당 환자는 흠칫 놀라며 "제가 이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데 어떻게 머리까지.. 아니, 감겨줄 수는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그 환자는 훗날 퇴원 후 한 인터뷰에서 그 순간을 회상하며 "그때 제가 너무 아프고 힘들 때였다"며 "도대체 이분들이 뭐기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나 하는 생각에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두꺼운 보호복을 입은 탓에 둔한 움직임이었지만 환자의 머리를 감겨주는 간호사도, 오랜만에 개운함을 느끼게 된 환자도, 마음속에 희망을 품게 된 시간이었다.

수액에 노란 색깔을 입혀라.

서남대학교 의과대학 명지병원

메르스 환자가 격리 병상에 있는 동안, 기간은 조금씩 다르지만, 담당 교수와 간호부장 등은 병동에 머물면서 숙식을 함께했다. 꼭 할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고 현장을 지키는 스탭과 전공의, 간호사 등과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간호부장은 간호사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조용히 그들의 힘든 점을 체크하고 격려의 말과 손길을 건넸다. 간호사들은 병원 전체가 자신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에 소외감 없이 치료에 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감염내과 이꽃실 교수 역시 숙식을 함께하고 배려를 위한 아이디어를 냈다. 우선 간호사들이 방호복을 착용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능한 반감기가 긴 항생제를 사용하여 격리 병실에 들어가 주사를 놓는 횟수를 줄였다. 혈압 맥박 등 생체 지표 측정이나 혈액 샘플 채취 등을 위한 시간을 환자들의 식사 배식 시간에 맞췄다. 격리 병실로 보호복을 입고 한 번 들어갈 때 가능한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자는 취지였다. 그래야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의료진 감염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격리 병실로 들어가는 의사들이 환자들의 배식 처리도 하는 영역 파괴가 이뤄졌다. 격리 병실 환자의 수액제 잔량이 CCTV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도록 비타민C 주사제를 수액제에 타서 노란 색깔을 입혔다. 수액 잔량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방호복을 입고 병실로 입실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 것이다. 모두가 이꽃실 교수의 아이디어였다.

인투베이션 하겠다고 퇴근도 미룬 간호사들

어린 간호사들은 치료 기간 이꽃실 교수를 '엄마' 혹은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이 교수의 배려와 관심이 엄마 이상이었다는 의미다. 김세철 의료원장과 김형수 병원장, 이장혁 행정부원장, 이장현 전략사업팀장 등 병원 경영진과 임원들도 격리 병동에 수시로 들러 "진료를 도와줄 수는 없으니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겠다"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말해달라"고 했다. 병원 경영진이 간식거리가 끊이지 않도록 해주고 힘들다는 느낌을 받을 틈조차 없도록 마음쓰는 것을 보면서 이들은 '모두가 함께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루는 상태가 호전되던 한 환자가 갑자기 악화돼 인투베이션(Intubation, 기관 내 삽관)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이를 전해 들은 중환자실 팀장과 소속 간호사 몇 명은 "인투베이션은 우리가 전문가"라면서 퇴근 시간 후에도 귀가하지 않고 병원 내에 한참을 머물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의료진과 병동 간호사들은 더욱 힘을 얻었고 팀워크가 강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전투하며 배우는 메르스 실전 메뉴얼

국내 메르스 발생 1년 전부터 대응을 시작해 매뉴얼을 만들어 놓은 명지병원이지만 실제 환자를 받아 치료하면서 '실전 매뉴얼'을 갖추게 됐다. 기존의 매뉴얼이 놓쳤던 부분이나 더 효율적인 내용으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보호구를 입고 벗는 세세한 방법부터 격리 병동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의 요령, 폐기물 처리방법 등이 더 구체적이고 안전하게 고안됐다. 예를 들어 앞사람이 격리 병동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벗은 방호복을 폐기물 박스 안에 넣어놓으면 다음 차례에 보호복을 입고 들어가는 사람이 박스를 밀봉해 내놓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안전성을 높이는 방법들이 모이고, 명지병원만의 새로운 매뉴얼이 만들어져갔다.

메르스 못지 않은 또 하나의 고충
"환자 치료에 바쁜 와중에 정부 제출 자료 준비로 밤 새워"

메르스 초기, 환자 치료만큼 바쁘고 힘들게 한 것은 외부 기관들의 줄이은 자료 요청이었다. 이는 여러 부서의 공통된 고충이었다. 더구나 똑같은 자료를 형태만 달리해서 정부 기관과 도, 시, 구 등에서 각각 요청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심한 경우는 동일한 부처의 바로 옆 부서끼리 경쟁적으로 똑같은 자료를 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다. 조금 전에 옆 부서에 드렸으니 받아서 공유하시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같은 기관 내에서 공유하면 될 것을 말이다. 이런 자료 요청에 응대하고, 여러 군데에서 걸려오는 확인 전화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게다가 병원 의료진은 메르스로 인한 가중된 업무에 시달렸다. 메르스 환자 치료 기간 명지병원이 메르스 대처에 투입된 인원은 직접 환자 치료인력인 음압병실 병동의 18명뿐만이 아니다. 이 밖에 응급실 선별진료소, 출입 통제, 지원 병동 등 거의 200여 명에 육박한다. 특히 병동 인력은 메르스 치료 이외의 업무는 전혀 볼 수 없었고 만에 하나의 감염 우려 때문에 다른 병동 일은 제외됐다. 지원 인력들도 평소에 하던 본업에서 빠져나온 상태이기 때문에 이들이 원래 근무하던 병동이나 외래, 행정 부서는 그만큼의 인원 공백이 생겼다. 메르스 의료진의 업무는 동료들이 고스란히 나누어가져야만 했다. 여기에 자료 제출로 추가 부담이 생겼으니, 메르스 못지 않은 또 하나의 고충이었다.

반면, 병원 측에서 정작 환자 치료에 필요한 내용을 문의하기 위해 정부기관이나 보건당국에 전화를 하면 10번 중 9번은 연결되지 않았다. 기대한 답변을 해주지 않는 경우도 많아 업무 진행을 힘들고 더디게 만들었다. 심지어 비상시 관리 강화를 이유로 메르스 환자 치료 기간 중 현장 점검을 나오는 부처들도 있었다. 이들이 종종 보이는 고압적인 태도는 메르스 환자 치료 현장과 지원 부서에서 일하는 의료진의 힘을 빠지게 하고 맥을 풀리게 했다. 물론 정부기관들도 초유의 메르스 사태를 맞아 정신이 없을 줄은 알지만,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았다.

병원 방문 겁난다며 회사 그만둔 협력업체 직원

서남대학교 의과대학 명지병원

메르스가 공포감을 주는 미지의 질환인데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괴담이 온라인 상에서 급속히 퍼지면서 병원 각 부서에서 이탈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외래 환자들을 돕고 안내하는 역할을 해주던 자원봉사자들 상당수가 병원 발길을 끊었다. 원래 하던 일에 공백이 생기면서 관련 기능 일부가 마비됐다. 협력업체 직원들 중에는 불안감으로 인해 병원 방문을 포기하고 회사를 떠나는 경우도 벌어졌다. 비록 소수지만 몇몇 직원이 감염에 대한 두려움으로 병원 밖 다른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시설팀에서 환경기사로 근무하는 한 직원은 메르스 확진자 전원 후 격리병동에서 나오는 의료폐기물을 담당하게 됐다. 원래는 협력업체 직원이 하는 일이었지만 그 직원이 격리병동 근처에도 가지 않겠겠다고 하는 바람에 관리자인 본인이 직접 담당하게 됐다. 의료진과 똑같이 감염 예방 안전 수칙을 준수한 상태에서 격리병동을 출입했지만 그 역시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싶어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감염 예방에 자신이 붙으면서 점차 안정감을 찾아갔다.

아빠가 환자인줄 알고, 아들이 "아프지마!" 편지 남겨

메르스 병동 의료 폐기물 처리를 담당했던 환경 기사는 만에 하나 있을 가족 감염에 대한 걱정으로 집에서의 처신도 평소와 달리했다. 그는 퇴근시간이 돼 병원을 나서기 전, 두 세 번 샤워를 했다. 집에 가서는 작은 방으로 바로 들어가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머물렀다.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아빠 근처에도 오지 못 하게 했다. 서로 할 말이 있으면 휴대폰 메신저를 이용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하루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가 아빠 먹으라며 방문 앞에 과자를 두고 갔다. 그 다음 날 아이는 아빠가 아파서 자기를 가까이 못 오게 하는 줄로 생각하고, 과자와 함께 '아빠! 아프지 마'라는 쪽지를 두고 갔다. 메르스가 낳은 가족간의 생이별이지만, 새삼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이처럼 병원 의료진은 모두 마음 한편의 공포감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며 지냈다. 이런 와중에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은 부모가 메르스 치료 병원에 근무한다는 사실만으로 아이가 학교에서 차별을 당하는 일이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니는 자녀가 친구들이 최근 자신을 따돌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눈물을 삼킨 직원이 적지 않았다.

"어머니 한번만 보고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서남대학교 의과대학 명지병원

메르스 사태는 병원내에서 메르스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까지 영향을 끼쳤다. 메르스 환자가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던 6월 중순경, 중동에서 거주하는 40대 남자가 명지병원 중환자실을 찾았다. 그의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데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한 것이다.

하지만 중동발 메르스가 한창인 상황에서 중동지역 거주자를 중환자실 내로 들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감염관리 지침도 그랬다. 이 남자는 비자 문제로 국내에 15일 동안밖에는 머물 수 없다며 눈물로 면회를 요청했다. 하지만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의 안전도 고려해야 했기에, 그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래도 차마 모자의 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거듭된 논의 끝에 그에게 감염 예방 안전 장구를 착용하게 하고 제한된 면회가 허용됐다. 메르스 사태가 빚은 예상 밖의 아픔이었다. 그도 머나먼 중동에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뵙고자 달려 왔을텐데, 어쩔 수 없었다. 면회를 제한한 의료진에도 마음의 상처가 남았다. 이처럼 감염 방지를 위해 면회 통제가 철저해지자 병원 내 곳곳에서 면회객과 의료진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그동안 자유롭게 이뤄지던 우리나라 병원의 문병 문화도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조금 바뀌어 갈 것으로 보인다.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모기

명지병원은 6월 15일부터 보건복지부와 대한병원협회로부터 '국민안심병원'으로 지정됐고, 선별진료소 운영을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원내 전체 출입구를 통제하고 방문객과 직원들의 체온을 측정했고, 정상 상태면 '안심' 스티커를 옷에 붙였다. 이날부터는 의심 환자의 원내 진입을 원천 차단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선별진료소에서는 진료 결과 폐렴 증상이 있을 경우 별도의 격리실에서 대기시키고 메르스 확인 검사(PCR)를 실시해 음성 결과가 나올 경우만 입원하도록 조치했다. 메르스가 아닌 일반 폐렴이어도 1인 1실이 원칙이었다.

의심 환자를 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는 선별진료소 목적상, 그 위치를 원내에 둘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건물 바깥쪽에 텐트와 컨테이너 등을 설치하고 이동식 장비 등으로 선별진료소를 차렸다. 그러다 보니 여름철 모기와 더위를 피할 수 없었다. 24시간 운영이 원칙이라 낮에는 무더위와 밤에는 모기와 맞서야 했다. 모기에 시달린 의료진과 직원들은 메르스보다 모기가 더 무서울 지경이라고 농담반 진담반 말을 나누기도 했다.

매일 1000여명의 환자 이력을 추적

서남대학교 의과대학 명지병원

메르스 의심자나 확진자가 원내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여 원내 감염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노력은 철저했고 처절했다. 명지병원은 선별진료소 운영과 함께 원무과에서 그날 외래로 들어오는 모든 환자의 이력을 매일 조회했다. 외래 예약 및 당일 환자들은 조회를 거쳐 메르스 의심 병원을 경유했거나 자가격리 대상인 경우 등을 가려냈다. 만약 여기에 걸리면 병원 진료 일자를 의심 상황이 지난 후로 안내했다.

이처럼 완벽하고 발빠른 대응 체계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오히려 담당자들을 당황케 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명지병원에 음압병실과 메르스 대응팀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메르스 감염을 걱정하는 환자들이 굳이 이곳을 찾아오는 선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실제로 명지병원 주변 유사 규모 병원의 메르스 검사(RT-PCR) 건수는 하루 10여 건에 머물렀지만, 명지병원은 같은 기간 100여 건의 검사를 기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병원이 발열 증세로 조금만이라도 메르스 감염이 우려된다 싶으면 의심 환자들을 죄다 명지병원으로 보내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선별진료소 책임자의 메르스 일지

메르스 대응 기간의 전쟁과 평화는 국가 그리고 각 병원 전체의 일이기도 했지만, 일선의 의료진과 간호사의 일상에도 파고들어가 있었다.

명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장으로서 선별진료소 운영의 책임까지 맡고 있었던 김인병 센터장(응급의학과)의 일기는 개인이 경험한 메르스의 양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김 센터장을 매일매일의 대응 현황을 개인적인 시각에서 기록한 일지를 통해 “(격리 병동에 들어서자) 왠지 숨쉬기도 싫었고 근처에 앉아있기도 싫었으나”라거나 “입원 환자의 이탈 가능성 높음. 공무원들은 민간 병원의 피해 규모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개인이 체감한 메르스의 공포감을 기록했다. 그는 6월 20일 일지를 통해서는 “오늘의 계획은 운동 연습하면서 머리 깍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중략...보건소장으로부터 전화가...중략...아침 식사 중에 밥을 먹질 못하고 병원으로 감”이라는 기록으로 메르스에 의해 뒤틀린 개인의 일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 또한 많은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느낀다. 두려움보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신경이 곤두서고 있고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쓴 25일의 일지에서는 메르스 사태가 길어짐에 따라 피로감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지의 마지막 날인 27일에는 “이사장님과 경영진에 대한 자기 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의미를 더욱 되새기며...중략...전사적인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라는 말로 병원 경영진들과 함께 나눈 앞으로의 다짐을 밝혔다.

아래는 김인병 센터장이 하루하루 기록한 메르스 개인 일지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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